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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ing on the flat]review....월간미술(Wolganmisool Art Magazine) 2009. 4


평면 위에서의 낚시질 (Fishing on the Flat)


  '아는 만큼 보인다(知則爲眞看)'라는 말이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으로 종종 인용된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특히 현대미술에는 더더욱 실감나는 문구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그렸는지 단서조차 잡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며, 왜 그렸는지도 모른다. 송명진의 그림도 참 알 수 없는 그림이다. 그런데 다행인 것은 그녀의 그림은 모르니까 지나치게 되는 것이 아니라 녹색이 강렬한 잔상을 남기면서 호기심을 잔뜩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2001년 첫 개인전을 열었던 송명진은 2005년 금호미술관의 영아티스트 전시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번 전시는 2005년 금호미술관 이후 개인전들에서 선보였던 작품들을 포함하여 신작까지 포괄하고 있어서 변화를 한눈에 가늠할 수 있었다.

   호기심을 갖게 하는 첫번째 요소는 녹색이다. 식물에 관심이 많은 송명진의 작품에는 2000년부터 녹색이 주조 색채로 두드러지기 시작하여 2001년 보다갤러리 전시에서는 녹색 그림들이 대거 선보였다. 작가에게 왜 초록색만 쓰냐고 물었더니 '저, 초록 말고 다른 색도 잘 써요~'하는 수줍은 대답이 돌아왔다. 대답이 만족스럽지가 않았다. 그런데, 작가와 대화를 나누고 작품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동안 과연 녹색이 다른 색으로 교체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이 생겨났고, 점차 작가에게 녹색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을 것이라는 확신으로 변해갔다. 노랑이라는 밝은 색채와, 파랑이라는 우울한 색채의 결합으로 생겨나는 녹색은 묘하게도 두 가지의 상반된 의미를 갖는다. 영어 green은 고어에서 growan(to grow)에서 비롯되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가장 상식적인 의미의 녹색이다. 흥미로운 것은 식물의 기본 색깔인 녹색이 성장, 희망 등과 같은 긍정적인 의미에, 또 한편으로는 죽음, 아픔, 질투, 악마 등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에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녹색은 두 가지 상반된 의미의 경계에 위치하는 것이다. 송명진 작품의 이해는 녹색의 이중성 혹은 경계적 위치에서 출발해도 좋을 것 같다.

   1층에서 시작되는 2005~6년 무렵의 녹색 그림들은 비교적 단순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끝이 둥글거나 뾰족한 녹색의 형태는 잎사귀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등동물의 촉수처럼 보이기도 한다. 실제로 작가는 한강 둔치나 하수구 등과 같은 곳에서 쉽게 발견되는, 잡초들이 무성한 풍경에서 모티브를 얻곤 하는데, 그림에서 보이는 돌기들의 번식력은 너무 강하여 여기 저기서 솟아나 이내 화면을 뒤덮을 것 같은 위협 마저 느끼게 한다. 마침내 녹색은 화면을 점령하고, 녹색에 점령당한 세상은 원시림의 생명력 보다는 스스로의 그악스런 번식력에 점령당한 폐허로 변해버린다. 2007년에 이르면, 녹색에 점령당한 폐허는 불완전한 '손가락 인간'에 의해 불안정하게 재구축되기 시작한다. 손가락이라는 말단 신경만 남은 '손가락 인간'에 의해 재구축된 세상은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진 이미지처럼 보이며, 손가락 끝의 클릭만을 통해 얼마든지 창조될 수 있는 가상의 인공적 공간을 떠올리게 한다.

   2005년부터 현재까지의 작품 경향은 크게 두 방향으로 갈래가 나누어진다. 2005년의 전시 '풍경의 표면'에서 보여주었던 <벌판 속으로(Into the Fields)>, <자라는 무덤(Growing Tomb)>, 등과 같은 작품들에서처럼 이미지의 재현과 평면성이라는 상반된 회화적 요소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는 경향과, 2007년 '녹색 집' 전시 이후에 등장하는, '손가락 인간'이 만들어내는 우화적인 세계에 바탕한 <어리석은 걸음(Foolish Step)>, <지나감(Passing Through)> 과 같은 작품들이 또다른 경향에 속한다. 평면에 대한 관심과 내러티브에 대한 관심의 비중에 따라 작품의 방향이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의 작품에는 일관되게 평면과 일루젼, 구상과 추상, 깊이와 표면 등과 같은 상반된 요소들이 충돌하고 있다. 3차원의 원근감을 흉내내어 어설프게 만들어진 풍경은 물감이 입혀진 표면이 긁히면서 얕은 흰색의 바탕이 이내 드러나고 마는, 그래서 이것이 가짜임을 명백히 밝혀진다. 여기까지 보면 작가가 회화의 평면에 대한 문제에 천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평면성 문제를 포함하여 위에서 언급한 회화의 제 문제들은 이미 철 지난 것이 아닌가. 작가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루치오 폰타나가 날카롭게 캔버스를 찢은 흔적을 세심히 그리거나, 엘스워스 켈리의 것과 같은 색면이 녹색 포스트잇으로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은 작가가 이미 평면성 문제가 어떤 것인지, 그 해결책들은 어떻게 제시되었었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면과 일루젼의 갈등 구조를 반복, 재현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작가는 두 가지 상반된 요소가 만들어내는 경계에 관심이 있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는 자연과 인간 혹은 자연과 인공, 움직임과 멈춤, 생명과 죽음, 현실과 비현실, 시간과 공간 등 무한히 많은 이원적 요소들의 대립과 갈등들이 존재한다.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진 작가는 주변의 그러한 상황들을 지나치지 않는다. 미술에서도 피할 수 없는 뿌리깊은 갈등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평면과 일루젼이라는 대립적 요소의 문제였던 것이다. 이제와서 그린버그가 주장하였던 평면으로의 환원에 대한 문제를 풀고자 한다기 보다는 작가의 눈에 보이는 인간 세상의 갈등에 대한 암시적 표현 또는 해결책이 바로 그의 회화가 아닐까?

   이번 전시 작품들을 살펴보자.  <끝없는 추락(Endless Falling)> <부드러운 기념비(Soft Monument)> 등은 이 전시에서 새로이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단순한 녹색의 색면 구성이 강조된 작품들과 손가락 인간이 만들어내는 우화의 세계는, 신작들에서 포스트잇과 같은 장치들의 등장으로 인해 표면성이 더욱 강조됨과 동시에 손가락 인간이 만들어내는 보다 복잡한 내러티브의 병치로 종합되고 있다. <어리석은 걸음(Foolish Step)> 연작에서 손가락 인간은 낙하산을 메고 녹색의 포스트잇으로 만들어진 산을 오르거나, 길을 걷거나, 바다를 건너고 있다. 그는 낙하산을 메고 산에서 뛰어내린 후 그 산을 다시 오르는데, 낙하산이 녹색 포스트잇을 휙 쓸어 떨어뜨린다. 어리석은 손가락 인간은 희망없는 노동, 부조리의 상징인 시지프 처럼 자신이 포스트잇으로 만든 엉성한 인공의 낙원이 자신에 의해 파괴되는지도 모른채 오르고 뛰어내리기를 반복한다. <끝없는 추락(Endless Falling)> 역시 낙하산을 탄 손가락 인간이 바닥에 나있는 조그만 구멍으로의 낙하를 계속한다. 그는 결코 구멍에 안착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구멍은 공간이 아니라 평면이기 때문이다. <부드러운 기념비(Soft Monument)>에서도 손가락 인간은 무의미하지만 나름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다. 이 작품은 기념비를 제작하는 석재공장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기념비에 쓰이는 글자는 종종 전혀 기념비에 어울리지 않는 내용들이라는 점이 작가의 흥미를 끌었다. 작가는 이를 놓치지 않고 예리하게 포착한다. 인간이 오래 전 만들어 놓은 기념비를 발견한 손가락 인간들은 여기에 새겨진 글자 위에 붙여진 포스트잇을 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포스트잇 아래로 슬쩍 엿보이는 '모나리자'라는 단어가 뭔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것을 해독하고자 애쓰는 장면이다. ('모나리자'는 작품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휴지 이름이기도 하다.)

   최근 송명진의 그림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손가락 인간은 비이성과 비논리, 비합리, 부조리에 굴복하여 퇴화한 인간의 모습이다. 그의 그림은 다름 아닌 선과 악, 삶과 죽음, 이성과 비이성과 같은 이분법적 갈등의 경계에서 고뇌하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녹색으로 넓게 칠해진 색면과 식물 잎사귀 혹은 돌기들, 흰 바탕 밑에 감추어 왔던 그의 인간에 대한 관심은 캔버스를 날카롭게 찢고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아무리 손가락 인간이 가는 실로 어설피 봉합하려 해봐도 소용이 없다. 손가락 인간은 이제 감추기를 포기하고 태연하게 평면 한 구석에서 낚시질을 하고 있다. 아, '평면 위에서의 낚시질'이라 했던가. 하마터면 낚일 뻔 했다. 송명진은 그 오래된 평면과 일루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가지는 이중성과 그들이 서있는 불안한 경계적 위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혜수 (삼성 리움미술관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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