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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done]전시서문_송명진....갤러리인 2012.11.21-12.15
  
  한 수 물리다

                                                                                                                                   송명진

  그간 내 ‘그리기’의 짧은 궤적에 관심을 뒀던 이들이 있다면 새로운 작업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가 좀 수월할 듯하다. 말(言) 이외의 방편들을 통해서 그림이란 결과물로 갈무리한 일을 돌이켜 말로써 다시 풀어내야 하는 처지가 그리 녹록치는 않기 때문이다. 근래의 작업들은 이전과는 좀 달라 보일 듯싶다. 우선, 대표색이라 할 만한 초록색은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으며, 가상의 캐릭터 ‘손가락 인간’들도 사라졌다. 대신, 화면의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단순해졌으며, 색채도 베이지색이거나 회벽색과 같은 중성색이 주조를 이룬다. 이전(2005~2009년)의 작품들 즉, 초록색의 작품들에선 그 소재들이 초록이라는 색채가 관습적으로 상징하는 것처럼 자연을 표방하고 있거나 또는 자연을 모방하는 재료로 쓰이며 이미지의 표면을 구성했다. 그 이면의 개념 틀은 회화라는 장르의 특성이자 한계라 할만한 ‘평면성(flatness)’의 문제로, 이것은 작가가 작품을 통해 스스로 회화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계기임과 동시에 관객에게 제시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예의 캐릭터가 등장하는 그림에서는 내부의 이야기 구조와 외부의 평면성이 서로 간섭하고 교류하는 관계를 보여줌으로써 두 상반된 개념의 결합가능성을 시험했었다.

  이제 근간의 작업들을 살펴보자. 화면에서 보이는 사물들은 주로 원기둥과 같은 간단한 입체도형의 형상을 띠고 있고, 약간의 형태적 가감을 통해 변주되고 있다. 그 단순 형태를 이루는 색채 또한 글머리에 언급한 바와 같이 초록색의 강렬함과 단호함에 비하자면 탈색된 색채라 할 만하다. 그것은 마치 흙의 색 또는 몸의 살색과 같아서 도처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색으로, 정색하지 않으면 미처 인식되지 못하는 그런 색감들이다. 또한 그 사물들이 일으키는 사태를 보자면, 화면의 원기둥은 그 내부에서 물성의 변화가 있은 듯 액체로 채워져 있고, 그것은 곧 바깥으로 흘러내려 지척의 구멍으로 다시 흘러들어 간다(Objects 2, Work 1,2). 화면에서 사건은 어떤 식으로든 발생하고 있지만, 물질은 결국 순환하며 원점으로 회기하고, 구멍은 메워져 평편하고 무심해지고 말 터이다. 작품들에서 등장하는 사물들은 흡사 블랙홀과 같은 시커먼 구멍들의 언저리에서 놀고 있다. 그 자리가 아슬아슬해서 무게중심이 잠깐이라도 흐트러지면 사물들은 구멍 속으로 꺼꾸러질 태세지만, 함정처럼도 보일 법한 이 구멍은 사물이 나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갈 출구이자 입구처럼도 여겨진다.

  또 다른 사태를 보자면, 종잇장처럼 둥글게 말린 원기둥의 열 위를 육중한 육면체의 덩어리가 서서히 미끄러지듯 전진하고 있다. 지탱해내기엔 역부족으로 보이는 원기둥들은 무거운 덩어리 아래서 용케도 버티고 있으며, 지나간 그 자리엔 버거웠던 흔적이 남았다. 더군다나 바닥엔 구멍들이 포진하고 있어 사태를 더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화면 전체를 가로지르는, 마치 낙서처럼 무신경하고도 과감한 붓질, 이것은 결국 이 모든 상황을 무화(無化)시키고 만다(Undone 1). 이처럼, 작품에는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사태에 무심하게 끼어들어 아무렇지도 않게 모든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드센 눈보라가 풍경을 삼키듯 물감 얼룩들은 화면 전체를 덮어버리고(Undone2), 탄력 있는 양감을 유지하며 굽이치던 뽀얀 살빛의 기다란 물체는 그 표면에 미세한 균열을 내고 어느 순간 갑자기 그 말단에서 사태를 종결시켜 버린다   (Undone 3).

  공들여 그렸다가 마구 지워버리고, 순탄하게 잘 흐르는 듯하다가 갑작스런 변덕으로 망쳐버린다. 그림을 그린 이 조차도 이와 같은 급작스런 쇠락에 당황스럽고 불안하긴 매한가지지만,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캔버스 화면은 그저 이미지의 놀이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싶다. 그림을 그리는 행위 또한 아이들의 놀이와 별반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이 실컷 갖고 논 후 진력난 장난감을 장난감 통에 다시 던져버리고 놀이를 마무리하듯이 나는 화면의 이미지들을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원래 비롯되었던 자리로 돌려보내고 있는 중인 듯하다. 발 밑 구멍으로 숨기건, 낙서로 뒤덮어 지워버리건, 구석으로 밀쳐놓건 말이다. 이것은 또 다른 이미지들이 놀 수 있도록 편평한 바탕으로 다시 비워놓는 것과 다름 아닐 것이다.

  일견, 허망해 보이는 이러한 상황들이 이전의 작품들에서 꾸준히 견지했던 회화의 ‘평면성’의 문제와 연장선상에 있는 것은 아닐까 스스로 유추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일 것이다. 작품의 외적 형식에 변화가 있다손 치더라도 한 작가가 꽤 오랫동안 견지해오던 태도에는 부지불식간에라도 그 관성이 남아 있을 법하니 말이다. 되새겨보자면, 평면 위의 선묘(線描)에 음영(陰影)을 넣어 무엇이건 실재하도록 만들어내는 방법을 처음 접한 소시적에, 그리는 이를 적어도 화면 위에서는 조물주로 격상시키는 명암법에 대한 경이(驚異)가 컸던 만큼이나 그 반대급부로 화면이란 평면의 바탕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자리 잡았던 듯싶다. 그래서인지 나는 늘 거대 담론이나 심오한 사상을 담기엔 회화의 태생이 불완전하고도 자기 모순적이라고 느꼈고, 이제껏 화면 속에 어떤 개념이나 의미를 담는데 흥미를 느끼기 보단 사전에 그 바탕을 의심하고 타진해보는 것에 몰두했었다. 그 구체적 방법론으로, 이전의 작품에서는 예컨대, 화면의 그려진 이미지들이 결국은 평면 위의 환영일 뿐이란 사실을 주지시키기 위하여 매끄럽게 묘사된 이미지들 틈새로 새하얀 캔버스의 평면을 드러내어 눈앞에 펼쳐보였다고 한다면, 근작에서는 전 단락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그저 작은 숨구멍을 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것은 충만하게 잘 묘사된 사물들 사이로 균열을 내어 무력하게 만들고, 결국 그 구멍을 통해 전복 가능하도록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기’라는 애초의 허튼 수작 위에 또 하나의 허튼 수작을 덧입히는 것처럼 무용(無用)해 보일 지라도 말이다.

  사실, 근작에선 화면에 어떤 의미를 담지도, 아니 오히려 지우려 애썼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듯싶다. 다만, 화면의 이미지들 간의 관계에서 시각적으로 경험되는 ‘촉각성’, 바로 이것만은 담보(擔保)하고자 했다. 이것은 앞서 언급했던 ‘평면성’과 같은 의미들조차 모두 지워버리고 난 후의 잉여의 실재이자 손톱 밑에 박힌 가시처럼 실상이다. 여기서 말하는 촉각성은 단순히 이미지를 사실적으로 묘사해서 손으로 만지고픈 욕구를 유발시키는 촉각적 감각이라기보다는, 일상에서 겪었던 내 몸과 사물간의 촉각적 경험을 그림을 통해 연상시키고 시각적으로 공감해 보는 감각이며, 화면의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다음의 촉각적 사태를 유추하게 만드는 ‘시각적인 촉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촉각은 인간의 몸이 사물과 직접적으로 접촉하는 과정에서 얻어지는 것이 당연한데, 습득된 촉각적 정보는 몸이 기억하도록 각인되어 새로운 사물을 접할 때 몸의 직접적인 경험을 생략하더라도 그 속성을 파악하게 만든다. 기실, 촉각성은 과거의 내 작품들에서도 예의 양감을 살리며 이미지를 묘사하는 방식으로 인해 낯설지 않은 감각일 터인데, 이제껏 이것이 기저에서 작용하는 잠재태(潛在態)였다고 한다면, 이번 작업에서는 의미의 차원보다 우위에서 강조되고 있다.  

  한편, 예술에 있어 작가와 그 작가가 창조한 작품은 서로 간에 얼마만큼의 필연성이 담보되어 있을까.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접적이고도 발 빠른 매체들을 차치하고 유독 그림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무언가를 표현하고자 할 때, 그 지난한 그리기의 과정 중에 끼어드는 우연들과 변형, 타협들의 과정을 수용해버린 결과물인 그림이 그린 이의 초심의 의도나 생각과 얼마만큼이나 일치될까. 작가가 작업에서 결과적으로 견지하고자 하는 의미나 개념은 작가와 필연적 관계라기보다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조우하는 것이 아닐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작품은 이제 작가를 오히려 설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을 통해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자의든 타의든 일종의 자기 기만적 행위가 어느 정도 끼어들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주체적이기보다는 다만 작품에 몸을 빌려줄 뿐이라고 말한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작가는, 아니 나는 그저 자족적인 무언가를 끄적대고 싶었을 뿐인데 말이다.

  요즘 난 내 의식을 마치 투포환 선수처럼 힘껏 저 멀리 전방에 던져놓은 느낌이다. 한편으론 내 뒤로 멀찌감치 떨어뜨려 놓은 듯도 하다. 그래서 내 몸이 내 의식을 쫓아가는 중인지, 아니면 내 몸이 내 의식으로부터 도망하는 중인지 헷갈린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겠다. 아무튼, 제풀에 지쳐서이건 합의에 의해서이건 언젠간 그 둘은 다시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남과 동시에 괜한 불협화음으로 다시 이별을 고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어리석어 보이는 숨바꼭질의 무한반복, 이 숨바꼭질의 궤적이 내 나름의 회화사(繪畫史)가 되지 않을까 내심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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