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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의 대해에 떠있는 질서의 단편들(이선영/미술평론)....Propose7展 2007. 6
  
   카오스의 대해에 떠있는 질서의 단편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송명진의 풍경에는 넓게 펼쳐진 매끈한 초록 색면, 동물적이면서 기하학적인 리듬을 가진 이상한 식물들, 이국적이고 외계적인 공기, 무색무취의 중성적인 분위기, 수수께끼같은 화면의 공백 등 낯선 요소들이 산재해 있다. 이러한 기이한 풍경의 단초가 된 장소가 진부하기 그지없는 개천가 풀밭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작가는 도심의 가장자리, 그 주변부에서 시작하여 변화무쌍한 평면들로의 모험을 시도해왔다. 가로 4미터가 넘는 대작 [풍경의 장](2005)은 작은 개울 양측면을 뒤덮은 풀같은 형상이다. 개울은 식물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채 바탕면을 드러내고 있다. 풀이 꽂혀있는 빈 구멍이나 풀이 들려있는 오려진 단면들도 보인다. 화이트는 일종의 공백같은 역할을 한다. 식물들이 수많은 돌기를 가지면서 그림의 녹색 표면을 넓혀가듯이, 공백은 평범한 지상의 단편에 무한을 개입시킨다. 구상적으로 본다면 그 공백은 하늘을 반영하는 수면이 된다.
모네의 [수련]이 21세기에 다시 그려진다면 어떤 모습일까. 모네의 연못이 땅과 하늘의 수많은 요소를 담아낸 무지개 빛을 머금은 상징적 우주라면, 송명진의 연못은 모네처럼 무한의 거울을 지향하면서도 모든 물질을 밖으로 뿜어내는 우주의 화이트 홀에 가깝다. [Making Paradise]는 사각형 담장으로 둘러쳐진 정원이다. 덧대어진 녹색면들과 하얗게 드러난 바탕면이 보인다. 파라다이스의 어원은 ‘담장을 둘러친 정원이나 공원’(R. 해리스)이라고 한다. 시간이 정지된 듯한 그곳은 미래도 과거도 아닌 영원한 현재에 존재하는 녹색 낙원이다. 담장 밖 어디선가 구해온 재료로 이식되거나 구성된 파라다이스는 잃어버린 낙원을 재창조하려는 노력의 소산이다. 신들의 사랑과 축복을 받는 천연의 장소인 ‘신성한 숲’이라는 고대적 개념은, 인간의 노동으로 경작해야 하는 농업과 대립되는 목가적인 정원이다.
그러나 송명진의 녹색 파라다이스는 생명과 창조보다는, 누더기처럼 기워진 인공적 장소임이 드러난다. 여기에서 자연은 이상적 세계에 대한 상상이며 동시에 문명의 가공물이다. 어디선가 이식해 온 잔디와 나무들이 심어진 [Gardening](2006)은 마치 몸의 일부가 잘린 동물들처럼 가지치기 된 단면이 붉다. 송명진의 작품에서 정원은 순수한 자연보다는 인공낙원의 양상을 띄고 있다. 파라다이스는 독한 양념 냄새를 풍기는 파밭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것은 안식처라기 보다는 탈출해야만 하는 곳이 된다. 파 밑둥은 붕대로 감겨있으며, 식물을 이루는 몸통도 실로 얽어져 있는 모습이다. 대지에 뿌리를 내렸다기 보다는 구멍에 꽂혀있다. 여기에서 자연은 19세기의 보들레르가 노래했듯이 거대한 신전과 비슷하다. 그러나 21세기의 자연은 만물과의 교감이 이루어지는 풍요로운 상징의 숲이 되지 못한다.
송명진의 작품 표면을 뒤덮는 녹색 식물들은 뿌리, 줄기, 잎, 꽃 등을 갖춘 전형적인 식물보다는 해초같은 원시적 식물처럼 미분화된 형태이다. 그것은 중력을 극복하고 하늘을 향해 높고 넓게 뻗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무정형적으로 흩어지거나 집적된 상태의 물질성을 가진다. 그래서 그것은 때로 [자라나는 무덤](2005)같은 형태로 변모하기도 한다. 모발이나 촉수같은 동물성 운동성을 가진 잡초같은 극악스러운 생명력은 순식간에 공백을 메꾼다. 그러나 그것들은 단단한 뿌리가 없다. 실제 자연이 아니라, 회화라는 표면에 얇게 식재된 추상적인 색면이다. 붓터치가 남는 회화적인 방식이 아니라, 사물의 뭉실뭉실한 촉각성을 살리는 그래픽적 방식은 실재성이 결여된 자연의 양상을 표현하기에 적합하다. 송명진의 그림에서 식물을 뽑으면 뿌리나 흙이 아니란 구멍, 또는 찢어진 평면 등이 드러난다.
그것은 본질이나 실체가 아니라, 시뮬라크르simulacre의 세계이다. 클론 덩어리처럼 보이는 이상한 식물들은 원본이 없는 동일한 복제이다. 시뮬라크르는 표상이나 재현이 아니라, ‘육화된 것, 감정과 물질성’(들뢰즈)이다. 미셀 카미유는 [시뮬라크룸]에서 들뢰즈를 인용하면서 신은 자신의 이미지를, 작고 자신과 유사성을 갖춘 인간으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 신의 이미지는 유지하고 있으나 유사성은 잃어버렸다. 인간은 시뮬라크르가 되었다. 요즘 작품에 나타나는 손가락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다. 송명진의 작품에 나타나는 자연은 원본과 복제 사이의 가능한 위계를 부정한다. 이렇게  와해된 재현의 공간은 관객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한다. 정확히 말하면 재현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재현의 체계가 카오스의 바다 위에 드문드문 분포된 고립된 섬이 되는 것이다,
‘공간으로 말하자면 공통면을 갖고 계획화되며, 운동으로 말하자면 공통의 극을 갖고 중심이 정해진 전체’(세르)는 사라진다. 카오스는 하나의 열린 공간이다. 여기에서의 전진이란 계량되지 않고 갈림길처럼 묶인 미지의 대지에서의 이동과 같다. 그것은 우리의 실제 몸이 속해 있는 3차원 공간에서의 이동과는 다르다. 그것은 측량과 노동과 이동의 공간, 즉 어떤 투영적 공간이 아니라, 수많은 공간과 다양체들이 교차하고 연결되는 지점이다. 송명진의 그림에서 갈라진 틈 위로 한없이 다시 나타나는 평면들, 그리고 그 위로 솟아난 다리는 어떤 불연속을 연결하는 수단처럼 보인다. 현대회화는 현실의 유일한 공간을 벗어나, 복잡한 연결 지점들을 구성하고자 노력해 왔다. 손으로 그리기란, 손가락으로 조정할 뿐인 기술 세계 못지않게 또는 그 이상으로 닫혀있고 격리된 요소들 사이를 매개하는 활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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