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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SE-Image Capture] 전시서문_강수미....갤러리 보다 2001. 10
 
“그 장면 360。 회전”
       -송명진의 그림들에 개입하기

...해석은 무한히 진행되며, 그 자체로 이미 해석이 아닌 그 어떤 해석 대상도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기의는 끊임없이 기표를 다시 부여하거나 다시 장전하거나 생산한다. 형식은 항상 기표로부터 온다. 따라서 궁극적 기의는 잉여나 “초과”상태에 있는 기표 자신이다...
          -질 들뢰즈(G.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F. Guattari), 『천 개의 고원 Mille Plateaux』중-


“풍경들, 소리들의 진실 됨?”

  그림이 보여주는 풍경에 대하여; 뭉퉁한 나무들이 가로(街路)로 늘어선 길을 따라 우리의 시선을 옮기면, 거기엔 창문이 많이 달리고 담쟁이 넝쿨로 뒤덮여 가는 무미건조한 회색의 건물이 있고, 그 모든 것을 응결시키고, 잡아채는 백색의 공간이 있다. 송명진의 회화는 또 이런 식이다. 짜리 몽땅한 고원에 난데없이 붉은 케첩 같은 소규모 화산이 폭발하고, 그 운동의 상태를 담은 캔버스 평면-여백은 짐짓 모르는 양 백색으로 발라져 있다.

  회화가 예를 들어, 영화에 대해 장점이면서, 단점은 바로 “시간성과 사운드”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영화에 대한 회화의 단점으로 회화가 직선적인(linear) 시간성, 즉 진행형(~ing)의 시간성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과 소리(sound)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을 든다. 그렇다면 바로 똑같은 조건에서 어떻게 “시간성과 사운드”가 회화의 장점이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가 직선적인 시간 관념과 물리적인 사운드라는 관념을 지우는 곳에서 발생할 수 있다.
영화에 대해 회화의 장점으로서의 “시간성과 사운드”는 그것이 구체적 작품에서 “응결된 시간성”과 “시각적 소리”가 선취되었을 때 가능하다. 그러니까 “응결된 시간성”은 회화 작품이 외부-실제의 시간에서 닫힘으로써 가능하다는 의미도 아니고, 그 체험되고 지각되어진 시간성의 “재현”을 통해서도 아닌, 바로 어떤 시간, 어떤 사건(그것이 가상의 어떤 것일지라도)을 구체화하고, “응결”시킬 때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시각적 소리”는 실재의 청각기관을 통해 감각되는 사운드 라기 보다 도상, 시각이미지, 기호들이 만들어 내는 의미들이 우리의 뇌 벽에서 감지될 때 발생한다. 예컨대 우리는 “띠리링”이라는 글자를 보면서, 동시에 자신의 귀 속 어딘가에서 전화벨의 소리를 듣는다.    
  송명진의 회화는 바로 이 “응결된 시간”과 “시각화된 사운드”를 목표로 하고 있다. 각각의 그림은 그 안에 선형적 시간성을 바탕으로 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지 않고, 어떤 풍경이 대상으로서 선택되어 지고, 그래픽(graphic) 그리기 기법으로 고정-응결되어 지는 과정을 통하여 앞의 시간도, 뒤에 오는 시간도 아닌 “잠시 멈춘” 시간, 그 “잠시 고정된” 풍경을 그녀는 자신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을 바꾸자면, 송명진은 우리에게 이미 일상화된, 지각되고, 인식된 풍경을 갑자기 정색하고 “순간 멈춤”으로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이 흔한, 너무 잘 알고 있다고 우리가 착각하는 “풍경, 사물, 사건의 진실 됨”에 의문부호를 붙이고, 방점 찍기를 미루는 것이다.
  또한 회화의 태생적 속성상 청각(소리, 사운드)의 결여, 시각 중심적 표현에 의한 청각의 억압이 당연한 것이라면, 송명진은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다른 미디어의 첨가(예컨대 오디오 등), 다른 장르의 속성(예컨대 영화적 사운드)을 빌려오는 것이 아니라, 오직 “청각을 시각적 기호로 환원”시킴으로써 그렇게 한다. 그녀 그림에서 화산폭발의 파편들을 보는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분출의 소리를 듣고, 새의 날갯짓이 일시 멈춰진 그림들을 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그 새가 “휘적휘적”나는 소리를 듣는다. 이것이 송명진이 생각하는 회화가 회화 안에서 “시각적 사운드”를 선취해 내는 진실 된 방법인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아직 선취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관람자(viewer)의 재탄생, 단순히 보는 사람이 아닌, 대상에 대해 개입하는 관찰자(observer), 즉 송명진의 회화가 관람자(the observer)를 탄생시켜 그들에게 “사고(思考)의 360°회전”을 부추길 때 가능하다.

[스펙터클] 초과된 기표들의 몽타쥬(montage)

  얼마 전(2001. 09.11)에 미국의 중심, 뉴욕의 맨해튼에 있는 세계 무역 센터(WTC)에 가해졌던 여객기를 이용한 폭탄테러 사건을 우리는 CNN뉴스를 송신 받은 국내 방송사를 통해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그 때, 테러 당한 세계무역센터 건물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청난 양의 검은 연기를 보면서 왜 나는 송명진의 그림을 떠올렸을까?
  
  무엇이 “영화 같다” 혹은 이제는 진부해진 표현이지만, “그림 같은 것(the picturesque)”이라고 할 때, 우리가 그런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전달하려 하는 바는 그것이 비현실적이고(현실을 초과하고), 감촉적 이기보다는 시각적이고, 주체적이기보다는 대상적 일 때이다. 우리의 “흥미”란 항상 대상이라는 존재자와 우리를 연결시킨다. 대상이 이런 저런 식으로 나에게 문제가 될 때, 그 대상에 의해 그 대상에 대한 흥미가 유발되는 것이다.
칸트의 “숭고(sublime)”의 개념을 설명하면서 흔히 드는 예로서, 광풍이 부는 바다의 저편에서 안전하게 그 광경을 볼 때 우리가 느끼는 감정, 자연의 불가항력적 힘에 대한 외경과 공포와 장관에 대한 복합적 쾌/불쾌의 정념을 우리는 “숭고의 감정”이라 한다.
  나는 이러한 상황설명의 예를 “스펙터클(장관:spectacle)”에도 적용하고 싶다. 월드트레이드센터에서 있었던 참사에 대하여 “영화 같다”라거나 “스펙터클의 연속”이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아비규환의 현장을 실제 몸으로 겪고, 이미 생을 달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 현장을 TV화면을 통해서, 신문지면의 사진을 통해서, 혹은 최대한으로 상정해도 그 곳, 그 시간 현장을 빠져 나왔거나, 근처 다른 빌딩에 있었던 사람들이 그 사건을 대상화시키고, “스펙터클”이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펙터클을 정의하는 반대편에는 “관람자(the viewer)"라는 냉정한 주체, 그 시선이라는 개념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이 관람자는 냉정한 시선의 주체이지만, 데카르트 적 이성의 주체라기보다는 일종의 스크립터(scripter)이다.
내가 보기에 “스펙터클”은 그러니까 언어기호체계 속에 기의는 없이 기표들만이 연쇄하고, 미끄러지고, 그 자신들만이 초과되는 것처럼 이미지라는 기표들의 초과, 그 초과된 기표들이 스크립터에 의해 몽타쥬(montage) 되는 곳이다.
  
  다시 송명진의 그림이 월드트레이드 센터의 참사 “이미지”와 겹쳐졌던 지점으로 되돌아와 보자. 참사가 일어난 그 곳에서 안전하게 떨어져서 촬영된 영상이미지(사진은 본질적으로 비개입적 이지 않은가!)가 일정한 편집을 거쳐 우리의 안방으로 전달되어 오듯이, 그러한 편집과 전달의 과정 속에서 사건은 “정지된(그것이 아무리 동영상 화면이라 하더라도)”이미지가 되고, “(위험으로부터)멸균된 스펙터클”이 되듯이, 송명진의 <뭉게뭉게>라는 그림에서 검은 연기는 작가의 의도대로 “정지된 (연기 덩어리)”가 되고, 새의 날개 짓은 “박제된” 새의 그것이 된다.
반복하는 것 같지만, 스펙터클에는 “사건”이라는 기의는 부재하면서 사건들의 껍질, 기표만이 과잉(생산)되고, 송명진의 그림에는 “시간”과 “사운드”라는 기의는 부재하면서 그것들의 기표들, 작가에 의해 몽타쥬 된 기표들의 초과만 보여진다. 그 곳에서 메시지를 발생시키고, 기표(정지)들을 기의(운동)로 재구성하는 것은 관람자(the observer)의 몫이다.

“그 장면 360。 회전”

  기표들의 연쇄, 기표들의 미끄러짐, 기표에 의한 기의의 실종을 말한 사람은 비단 들뢰즈, 가타리 뿐만이 아니다. 소쉬르가 그랬고, 하이데거가 그랬으며, 데리다 등등이 설파했다.
그러나 나는 하이데거가 “존재(sein)”에 대하여 사유하기 위해서는 [존재]라는 기표를 지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언명하기 위해 [존재]라는 기표를 남겨놓아야 한다고 했듯이(under erasure: 삭제 하에 둠), 회화를 (사유)하기 위해서는 회화를 삭제 하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이런 생각은 “회화의 탈주”니 “장르간의 혼성”이니 하면서 다른 매체를 적당히 덧붙이거나, 여러 매체적 외양을 빌려 그 표면 효과만 번지르르하게 윤색하는 것은 말의 엄정한 의미에서 “회화의 사유”도, “탈주”도 “혼성”도 아니라는 것이다.
  현재의 회화에 대한 인식적, 표현적, 방법적 사유는 내가 생각하기에 모더니즘 회화의 “부정성(negation)”을 부정하지 않고, 포스트 모더니즘의 “다양성”, 혹은 “혼성”을 표면적으로 차용(appropriation)해 오지 않을 때 이루어진다고 본다.
  
  앞에서 나는 송명진의 회화를 “초과된 기표들의 몽타쥬”라 규정했고, 그 곳에서 메시지를 발생시키고, 기표들을 기의로 재구성하는 것은 관람자의 몫(techniques of the observer)이라 했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추상적인 방법이고, 한 편으로는 구체적인 행위를 수반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의미는 관람자가 송명진의 그림을 보면서 그녀의 그림이 제시한(혹은 정지시킨) 풍경들을 반동(反動)적 이미지로만 수렴하지 않고, 그림이 제시하는 것을 단서로 어떤 사건(시간)의 연속성을 자신의 대뇌에서 360°재구성해 보는 것이고, 후자의 의미는 실제적으로 전시 공간에서 그림이라는 사물들이 배치(디스플레이)된 상황을 360°로 돌면서 보라는 것이다. 예컨대 “검은 연기” 그림을 보면서, 미국 월드트레이드 참사를 떠올릴 수도 있고, 굳어진 연기의 형태 속에서 다른 형상(좀 섹슈얼한)을 숨은 그림 찾기 할 수도 있을 것이며, 화산 폭발의 큰 그림을 중심으로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그 그림의 다른 장면 그림(시점이 다른, 혹은 큰 그림 밖 어딘가에서 새가 나는 그림들)들을 360°한 바퀴 돌면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끝으로 사족이면서 이 글을 통해 가장 하고 싶은 말은, 롤랑 바르트가 모더니즘회화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을 비판한 “부동성, 죽음의 세계, 동어반복(tautology)의 세계”를 넘어서고, 회화를 피와 살의 세계, 불규칙의 세계로 돌려놓기 위해서는 지금 송명진이 그녀의 작업을 통하여 실험하는 것에 더하여 자신이 속한 “역사의 현재 지점을 정지시키는 개입의 사유”가 그녀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것이다.

왜? 그녀는 작업실 밖(de-self)으로 나왔으므로.  

        
 강수미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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