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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shing on the flat] 전시서문_이수균/강수미....성곡미술관 2009.3.5-4.5
경계에 위치한 회화

송명진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은 “식물/동물, 자연/인공, 멈춤/움직임, 평면/입체 등 끊임없이 경계선상에서 모호하게 서 있는 것을 즐긴다”고 하였다. 사실 작가만큼 자신의 작품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녀의 최근 일련의 연작들에서 잘 드러난다. 시시각각 변하는 연기의 움직임에서 순간적인 형태를 포착함으로써 움직임과 정지의 중간단계에 서 있고자 했으며, 그 형태조차도 유연한 기체나 액체의 형태가 아니라 매우 견고하고 딱딱한 조각적인 형태를 취하게 함으로써 기체, 액체, 고체의 물질성의 경계에 머물고자 하였다. 그녀의 잔디나 나무는 작가의 표현처럼 극악스러운 동물성을 드러내며 식물과 동물의 중간에 머무르고자 하고, 역으로 동물들, 특히 인간들의 형상은 진화의 초기 단계로 후퇴하여 기능이 분화하기 전의 형태, 즉 식물적인 단순한 손가락 인간들로 퇴행한다. 그리고 그녀의 풍경들은 인공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강한 폭풍이 휘몰아치는 험한 원시림이나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전혀 다른 우주 속의 자연을 연상케 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질식할 듯이 엄격한 규칙에 종속된 인공적 풍경처럼 드러난다. 그러면서 자연은 인공에게 그 자연성을 제공하고 역으로 인공은 자연에 그 인공성을 빌려줌으로써 자연은 더 이상 주어진 그대로의 자연이 아니고, 인공물 역시 그 본래의 유용성을 버리고 완전히 다른 기괴한 형상으로 변모한다. 그녀가 이번 전시에서 특별히 천착하고자 한 평면성과 이미지의 관계에서도 무한 공간의 상징으로서 우주적 질서를 내포한 단일한 색조의 평면, 즉 아플라와 그 아플라로부터 분할하거나 폭발하듯이 솟아나는 또 다른 평면이 무한한 공간감과 함께 극히 얇은 표면성을 공유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그녀의 눈도 마치 적록 색맹에 걸린 것처럼 색채의 혼합과 혼란을 극도로 회피하고 모노크롬의 세계로 흡수되기 직전에 이르렀기 때문에 적과 녹은 이제 거의 구분이 필요 없는 상태이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모든 작품들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구성되어 그 현란한 변화가 극치에 이르렀다. 이제 그녀 나름대로의 상징적 체계가 그 폭과 깊이를 한층 더하여 우리를 오묘한 상징의 숲 한 가운데로 인도해주는 것 같다.  

모든 예술의 기본은 낯설게 하기 속에 들어 있다. 따분한 일상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허무맹랑해 보이는 아라비안나이트가 그렇게 널리 그리고 오랫동안 인구에 회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창작이란 한 예술가의 독특한 세계관이나 시선으로 세상을 다시 조립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 시선이 포착하는 세계는 예술가의 상상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형을 겪는다. 그러한 변형 작업을 통해서 렘브란트의 세계가 만들어지고 고호의 세계가 만들어지며 세잔느나 피카소의 전혀 다른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독특한 시선을 가진 예술가들 덕분에 자신의 것과는 다른 새로운 세상을 하나 더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가와 관람객 사이에는 일종의 무언의 계약이 체결돼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의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관을 제시한 작가의 세계관을 용납해주고 거기에 잠시 거주한다는 것이다.

송명진은 일찌감치 이러한 낯설게 하기 수법의 필연성과, 그에 따른 작가와 관객 사이의 무언의 예술적 계약 관계를 파악하였다. 그래서 초창기의 작품부터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파악하기 위한 격한 몸부림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녀는 맹목적인 낯설게 하기가 자신의 그림들을 너무 거칠게 만들 수 있음을 깨닫는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러한 수법의 상투적 남용은 자칫 기괴함이나 무의식 세계의 탐사, 동화적인 상상 세계, 꿈과 같은 허무맹랑한 세계 속으로 안주하도록 유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다시 피상적으로 초현실주의를 답습하도록 할 위험이 있다.

송명진 회화의 최근 전개 과정을 보면 그녀가 피상적인 낯설게 하기 수법을 벗어나 이제는 일관되게 자신과 회화와의 관계, 더 나아가서 회화와 사회와의 관계에 대해 고심하고 있으며 그 문제를 미학적이고 철학적인 고찰의 단계에까지 끌어올려 자신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바탕으로 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이 단순히 시각적인 즐거움만을 주기를 원치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어떤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만을 원하는 것도 아니다. 특히 그녀가 손가락 인간들의 역사를 우스꽝스러운 바보짓으로 기술하였다고 해서 그 서술적 기능만을 읽어내려고 하는 것은 그녀의 회화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과도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녀의 회화 속에서 철학적 메시지란 결국 사물을 마음으로부터 다르게 보기 위한 하나의 단초를 제공함으로써 진정으로 그 낯선 모습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주어진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 즉 경계선상에 위치한 눈으로 보게 되면 사물들이 가지는 거대한 은유의 세계가 드러나게 되며 숨겨진 새로운 의미가 모습을 드러낸다. 송명진의 회화는 바로 이 독특한 은유의 세계에 다름 아니다. 그 곳에서 사물들은 공통의 것을 교환하고 다름을 더욱 다르게 한다.

                                                                                                       성곡미술관 학예실장 이 수 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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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그림에 대한 이야기, 혹은 어떻게 다른 차원의 회화적 문제들이 결합하는가?

1. 짧은 리뷰    
   기억하는 이가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지난 2005년 송명진의 금호미술관 개인전, <풍경의 표면>에 붙인 서문에서, 이 작가의 당시 그림들을 그린버그식 형식주의 미술(Greenbergian Formalism)에 ‘샛길’을 내는 젊은 세대 회화 중 한 시도로 분석했다. 요컨대 그때의 송명진 그림은 모더니즘 미술 문법이 회화의 본질적 속성으로 정의한 ‘평면성(flatness)’을 다루되, 고도의 추상이나 물질성이 아니라 관객의 사고를 자극하는 모호한 형상을 통해서 단색의 평면을 강화하거나 간섭함으로써, 그 회화적 조건 문제를 나름대로 해결한다고 본 것이다. 예컨대 전체가 불투명 녹색(‘opaque oxide of chromium’)으로 칠해진 화면에, 마치 그 화면을 잘라 뒤로 젖혀놓은 것 같이 보이는 면(面)들을 그린 그림이 있다.() 여기서 그녀의 그림은, 형상의 묘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평면’이라는 회화적 정체성을 개념적으로 의식한 것이었다. 부득불 주종관계로 이를 표현하자면, ‘회화의 평면성’이라는 것이 주(主)-개념이고 ‘묘사된 형상’은 종(從)-모티브가 되면서, 그림의 ‘부분 요소’인 형상이 그림의 지적 차원과 감각적 차원 모두를 포괄한 ‘전체 구성’에 기여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후 송명진의 그림은 좀 다른 방향으로 변화했다.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감이 없지 않지만, 2006년에서 2007년 사이 그림들에서는 형상의 묘사 또는 이미지로 묘사된 사건이 주를 이루고, 회화의 평면성을 문제시하는 개념적 차원은 뒤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어느 시기의 송명진 그림이 더 좋고 나쁜지에 대한 평가를 하고자 이러한 분석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림이란 그것을 이루고 있는 여러 요소들의 구성이라 할 때, 한 작가의 회화가 각 시기마다 어떤 변별점을 갖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어 서다. 나는 송명진의 2006-2007년 그림들은 그림 속 이야기의 내용이 많아지고, 대신 그림을 구성하고 있는 메타 개념(meta concept)은 약화됐다고 본다. 후자의 약화에서 결정적 요인이 역설적이게도 전자, 즉 ‘그림 속 사건을 묘사하는 디테일 이미지의 매력’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말하자면 감상자의 입장에서 이 시기 그림들은, 그림을 시각적으로 즐길 수 있는, ‘그림 속 이미지’에서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는, 그런 디테일로 채워진 그림으로서 매력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이즈음부터 그녀의 작품에, ‘그림 속 세상의 행위자’로 등장한 가상의 캐릭터가 한몫했을 것이다. 엉덩이와 다리로 이뤄진 하체만 있는 인간처럼 보이는 이 캐릭터를 작가는 ‘손가락 인간’이라 부르는데, 말하자면 송명진의 그림은 이 우둔하고 이상하게 생긴 생명체들의 좌충우돌 생활기를―물론 작가가 지어낸 그림 속 삶의 우화(寓話, allegory)로서―만화경처럼 보여주는 장(場)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이 손가락 인간 캐릭터와 그들의 공상적 세계가 디테일하게 화면의 매력적인 이미지로 풀리는 가운데, 송명진의 작품들에서 ‘회화’에 대한 메타적 차원의 주제들, 개념적 사고가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내 판단이다.

2. 액자 구조, 메타 내러티브의 디테일    
   그렇다고 작가 송명진이 자신의 미술세계를 구축하기 위해서, 반드시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회화의 구조적 조건을 개념적으로 떠안고 가야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나는 첫째, 작가의 초창기 작업에서부터 그 개념적 측면이 형상과 더불어 해결될 기미를 보인다는 데 큰 흥미와 기대를 가졌기 때문에 앞서와 같은 맥락의 변화를 언급했다. 둘째, 2007년부터 지금까지 하고 있고, 이번 성곡미술관 전시에 선보일 새로운 그녀의 그림들에서 다시 한 번 ‘평면성과 삽화적 이미지의 결합/결합불가능성’의 문제가 다뤄지고 있다. 그 점에서 송명진 스스로가 여전히 이 주제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때문에 우리 또한 여전히 이 논제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는 것이다. 물론 송명진의 작품이 또 다르게 변화의 양상을 보여준 만큼,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겠지만.
   ‘그림 속에서 삽화적 디테일이 무엇으로 작용하는가, 단순한 볼거리인가? 아니면 한 눈에 파악하기에는 쉽지 않은 작품의 개념적 성격을 알레고리적으로 전달하는 형상들인가?’가 이제부터 우리가 보려고 하는 송명진의 최근작에 대한 비평 포인트이다. 핵심을 먼저 말하자면, 이 그림들에서는 ‘평면’이라는 회화의 물리적 조건이 그림 내부 이야기의 차원과 동시에 그림 외부 메타 개념의 차원에 두루 관여한다. 이를테면 여전히 송명진의 그림은 예의 ‘손가락 인간’이 등장하는 우화처럼 보이는데, 그 알레고리가 지시하는 의미가 ‘회화 일반’ 또는 좁혀서 ‘모더니즘 미술이 정의한 회화’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그렇게 알다시피, 일반적으로 회화란 2차원 평면에 물감과 붓(또는 그 밖의 질료와 도구)으로 그림을 그리는 행위 또는 그러한 행위의 결과물을 일컫는다. 여기에는 청각이나 촉각 같은 감각보다는 시각이 우선시된다. 달리 말해서 회화는 소리가 없고, 만질 수 없으며, 오로지 평평한 표면 위에 이미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 일반적 조건을 고스란히 유지하면서, 게다가 그린버그가 모더니스트 회화에서 터부시한 ‘환영을 유발하는 재현 형상’과 ‘이야기’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우리는 회화 바깥에서 회화를 (생각해) 볼 수 있을까? 달리 말해서, 메타 크리틱(meta critic)할 수 있을까?
   송명진이 구축한 해법은 ‘액자 구조’이다. 그림 속에서 펼쳐지는 우화의 내용이 곧 ‘회화(일반)에 대한 논평’이 되고, 그 논평이 ‘말’이 아닌 ‘화면 자체의 이미지’로 구현되는 이 그림들은, 다름 아닌 액자구조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내가 말하는 액자구조는 가시적으로 그림 속에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는 전혀 아니고, 우리가 그림의 주제를 이해하려 할 때 내용상의 의미에서이다. 이 구조가 바로, 송명진의 지난 2006-2007년 그림들과 이후 현재까지 그린 그림들을 분리시키는 계기인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전자에서 누릴 수 있는 시각적 만족과는 다른, ‘우화적 이미지를 통한 지적 유희의 가능성’을 후자에서 발견할 수 있는 요인이다. 작품을 보며 이에 대해 얘기해 보기로 하자.

3. 알레고리의 디테일과 평면 회화의 원칙
   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처음 보면, 모르긴 몰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담하게 화면의 거의 8할 정도에 걸쳐 칠해진 녹색의 평면에 눈이 갈 것이다. 그런데 이 면은 실제 캔버스 자체의 2차원 공간인 동시에, 그림 속에 묘사된 내용으로서 녹색종이 갈피들이 허공에 그물 같이 매달려있어 보이는 3차원 공간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림 윗부분에서는 색면회화(color field painting)처럼 단지 녹색으로 칠해진 면들이 점차 화면 아래로 내려오면서는 재현된 사물, 즉 성긴 녹색종이 벽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어느 지점에서라고 말할 수 없이, 이 그림에서 실제 물리적 공간은 가상의 이미지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송명진의 <...step 1>은 그림에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 현실의 캔버스가 가진 2차원 공간성을 자기 지시하면서, 그 순간 또 다르게 3차원처럼 재현된 공간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이 그림에는 회화(일반)에 대한 논평이 그림 속 알레고리로 곳곳에 현상돼 있다. 예를 들면 녹색종이 쪽지 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캔버스의 흰색 바탕 위에, ‘드로잉 선’을 연상시키는 흔적을 그려 넣은 것이 그렇다. 또 모더니즘 회화가 작가의 현존이자 그림의 자기 지시성(self-referentiality)으로 숭배했던 ‘붓질(brushstroke)’, 그 붓질을 패러디한 하단의 우화적 형상들이 그렇다. 짧은 붓 터치 모양을 한 그것들은 바야흐로 녹색종이 그물 벽에서 카드 정도 크기의 그 종이들을 떼어 내려고 고군분투하는 모습인데, 이는 분명 그림이 그려진 얇은 이미지의 표피를 제거하고 액면 그대로의 캔버스를 드러내려는 작가 의도가 투사된 모습인 것이다. 이처럼 내가 말한 송명진의 ‘액자 구조’는 그림 속에 묘사된 형상들의 디테일이, 바로 메타 차원에서 ‘회화의 정체성’을 스스로 드러내는 창작 행위가 되는 ‘이미지-개념 결합방식’을 뜻한다. 이와 비슷한 맥락이 , 에서도 반복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어느 것에는 우화의 성격과 디테일한 사물의 묘사 정도가 더 짙고, 어떤 것에서는 모더니즘 회화 문법에 대한 코멘트의 성격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다.
   이상에서 논한 내용과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회화의 조건을 문제시한 그림들이 연작이다. 여기서 중점적인 문제는 앞서와 같은 ‘회화 공간’의 차원이 아니라, 회화에서 주변적이거나 취약한 감각인 ‘촉각’이다. 작가가 자신의 집과 작업실을 오가는 길에 마주치게 되는 벽제 지역의 석재 공장 앞에 전시된 기념물로부터 영감을 얻었다고 말하는, 이 그림의 주요 모티브는 다름 아닌 기이한 형태의 돌조각이다. 분명히 좌대 위에 번듯하게 올라 있으니 ‘조각’임에 틀림없어 보이는 이 형상들은 생기다만듯한 모습이고, 보는 이가 거의 본능적으로 피부에 부드러운 감촉을 느낄 만큼 물컹하고 푹신해 보인다. 쭈글쭈글한 뇌같이도 보이고, 혀가 구부러져 꽁꽁 매져 있는 것으로도 보이며, 토끼처럼 긴 귀를 여러 개 가진 머리와 엉덩이가 맞붙어 있는 괴생물체처럼도 보이는 이 일련의 그림들이 감상자에게 주는 느낌은 분명 시각을 통해 전달됨에도 불구하고 매우 촉각적인 것이다. 마치 눈으로 캔버스의 표면을 더듬을 수 있다는 듯이, 혹은 어루만져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부드러운 기념비’들이 그려진 그림들에서, 시각 중심의 회화라는 고정 관념은 다시 한 번 그 전제를 의심받으며 우리 감상자의 의식 뒤로 물러난다.
   다른 한편 여기서도 우리는 앞서 논한 그림들과 마찬가지의 액자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방금 말한 것처럼, 이 시리즈의 그림에서 시각만이 아니라 시각이 곧 촉각과 연결되는 회화의 조건을 우리는 그림을 보며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속에서 펼쳐지는 우화적 형상들의 행위 또한 시각이 촉각적으로 ‘경험’되고, 촉각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감각에 대해 은유적으로 전달하고 있기 때문에, 감상자는 그림 앞에서 부지불식간에 ‘느끼는’ 것이다. 특히 이 그러한데, 여기서 예의 ‘손가락 인간들’은 하얗고 가는 실로 좌대 위의 부드러운 기념비를 꽁꽁 묶는 기이한 행동을 연출함으로써, 그 재현된 기념비가 부드럽고 푹신푹신하다는 점을 감상자에게 인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송명진의 최근 그림들을 둘러보건대, 우리는 이 작가가 다시 한 번, 그러나 초기의 방법론과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회화에 대한 메타 내러티브와 삽화적 이미지’를 관계 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송명진은 얼핏 뻔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림 내부의 이야기’와 ‘회화(일반)에 대한 메타 이야기’라는 다른 차원의 두 문제를 연결시키기 때문에 복잡할 수밖에 없는 그런 결합을 통해, 커다란 회화세계에 자기만의 그림을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그 과정은 내가 보기에 우화에 경사된 표현과 디테일 이미지로 평범해지는 양상을 띠기도 한다. 또 어떤 그림은 디테일이 주는 시각적 재미와 매력이 보다 강해서, 감상자가 다른 어떤 생각, 이를테면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구성이라든가, 그림의 요소라든가, 시청각적 경험에 대해 반추할 계기를 갖기 힘들게 한다. 물론 그림의 성공적인 디테일은 보는 이를 놀라게 하고, 눈을 즐겁게 할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움직인다. 그런 점에서, 바르트(R. Barthes)가 『작가 솔레르스 Sollers écrivain』에서 “경이는 환희의 수줍은 시작”이라 쓴 말은 비단 문학뿐만 아니라 미술에도 전적으로 타당할 것이다. 하지만 송명진의 최근작에서 볼 수 있듯이, 그림 감상의 환희는 우리가 그림의 여러 차원들을 읽고, 의미를 꿰고, 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는 터전(이미지의 표면) 위에서 이루어질 때 보다 풍요롭고 충만한 것이 된다. 문학작품을 읽으며 눈에 보이듯 장면을 떠올리고, 상상의 시공간을 넘나드는 와중에 세계를 경험해 가듯이.

                                                                                                                         강 수 미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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